알타르프는 자연스럽게 사달멜리크보다 앞서 주점으로 들어갔다. 지하 수로에서부터 거리낄 것 없는 걸음은 분명 저 보란 것이었다. 협력은 이미 결정된 일인데 알타르프는 내처 센 척을 했다. 허세와는 다르다. 사달멜리크는 알타르프의 억센 고집과 기질 때문에 뜻을 꺾었으니까. 그러니 지금 태도는 각오를 드러내는 것에 가까웠다. 알타르프는 자꾸 가벼운 마음으로 스파이를 자처한 것이 아님을 보이려 했다.
“너 언제까지 그럴 거야?”
“뭐가?”
테이블 위 종을 누르려던 알타르프가 고개를 돌렸다. 가면 너머 모르는 얼굴의 시치미 떼는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 이마를 찌푸렸다.
“허세 그만 부려. 바보 같아.”
“갑자기 왜 시비야? 내가 언제?”
몸이 완전히 사달멜리크 쪽으로 돌았다. 사달멜리크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협력을 철회할 생각은 없었지만(무엇보다 알타르프가 가만히 있을 리 없고)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성격이 걱정스러웠다. 알타르프가 다른 봉사자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사달멜리크가 느낀 바로는 그랬다. 알타르프는 금방 골을 내기 일쑤였다. 사달멜리크는 그 태도가 자신이 그에게 퉁명스럽게 굴기 때문이라는 것을 몰랐다.
“네가 끼워 달라고 암시장에서 깽판 쳤던 거 잘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럴 필요 없잖아.”
“깽판이라는 말은 좀 그러네. 누가 언질도 없이 잠적하지만 않았어도 얌전히 있었을 텐데.”
“한 짓을 부정하지는 않네?”
“다른 사람한테 피해 주지는 않았잖아.”
“애들이 곤란해 했거든?”
“내가 무작정 떼쓴 것처럼 말하지 좀 마. 너 같으면 가만히 있었겠어?”
“아니. 쥐어 패서라도 내 말 듣게 했겠지.”
“너한테는 양심이란 게 없냐?”
주점 안에서 유치한 말다툼이 이어졌다. 승자 없는 소모적 언쟁 끝에야 종이 울렸다. 수아로킨이 명랑하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뭐로 하시겠어요?”
사달멜리크는 옆자리에 앉은 알타르프를 곁눈질했다. 플라네타리움의 뒷면에 의구심을 품고 단서를 찾은 지 며칠 만에 암시장을 발견했다. 진실을 좇아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알타르프와 교류를 완전히 끊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휘말리는 건 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알타르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알타르프가 암시장의 존재와 사달멜리크가 품은 생각을 어렴풋이 눈치챘다는 것을 사달멜리크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실마리도 없이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는 알타르프도 팔찌처럼 잘라낼 수 있다고 믿었다. 시스템의 감시망에서 사라지듯 알타르프에게서 실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알타르프는 그것이 대단히 불쾌했다. 암시장이나 아지트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서는 사달멜리크가 부재중일 때만 골라 아지트를 어지럽혀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결국 두 손을 들고 꽃집에 찾아가기 전까지 사달멜리크는 암시장을 드나드는 알타르프를 보지 못했다. 수아로킨과 교류는 있었는지, ‘일탈’은 해 보았는지도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러니 주점에서의 알타르프가 어떤 모습일지 조금 궁금한 정도야 이상한 일은 아닐 터다.
알타르프는 사달멜리크의 시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왜 보는데?”
“술 마실 줄은 아나 싶어서 본다.”
“그러는 너는 알고?”
“내가 태평하게 술이나 마실 시간이 있었을 것 같아?”
“바쁜 몸이 술잔 기울이러 행차해 주셔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술을 낮잡는 듯한 말에 대화를 듣던 수아로킨이 발끈한 기색으로 다툼을 끊었다.
“뭐로 하시겠어요~?”
“……주인장 추천으로.”
사달멜리크는 적당히 주문했다. 반면 알타르프는 고심하는 듯했다. 선반과 유리장에 진열된 라벨을 하나하나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겉포장으로 내용물과 성분을 파악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똑같은 가면을 쓴 봉사자들과 라벨을 입고 누워 있는 술병들 중 각자의 본질을 알기 쉬운 것은 어느 쪽일까.
“술의 이름에도 의미가 있어?”
“물론이죠! 유래가 알려지지 않은 것이 훨씬 많지만요. 궁금하세요?”
알타르프가 문득 던진 질문에 수아로킨은 화색이 됐다. 설명하고 싶어서 가면 위로도 눈을 빛내는 것 같았다. 알타르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달멜리크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큰일을 하려고 하거든. 잘될 수 있게 그런 의미가 담긴 술이면 좋겠는데.”
“큰일? 플라네타리움에서요?”
“그런 게 있어. 너도 이런 곳에서 주점을 하니까 알 것 아냐.”
“하긴 그러네요! 그렇다면 어디 보자…….”
진열장을 기웃거리던 수아로킨이 손가락을 튕겼다. 곧 수아로킨이 꺼내 든 것은 라벨에 ‘블루 문’이라고 적힌 병이었다. 안이 빈 것으로 보아 전시용인 것 같았다.
“이만한 게 없죠! 지하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이 술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어떤 건데?”
그런 말이 나오니 사달멜리크도 관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보다 상체를 가까이 숙인 두 사람이 수아로킨의 일장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불가능’.
수아로킨은 그렇게 설명했다. 모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은유를 담은 술을 바라본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유래가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직관적이지 않아요? 푸른 달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분명 그런 뜻이겠죠.”
“나는 반대야.”
“좋네.”
아니꼽게 팔짱을 낀 사달멜리크가 동시에 튀어나온 알타르프의 대답에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의도로 추천한 건지는 알겠는데 내가 볼 때는 너무 자의적 해석 같아. 불가능이라는 말 자체가 부정적이라 안 내켜.”
“한 잔 줘.”
“야.”
“옆에 투덜이한테도.”
주문 확정 선언에 수아로킨이 흔쾌히 투명한 유리잔 두 개를 꺼냈다. 대가로 포도와 체리 따위를 내미는 알타르프에게 사달멜리크가 눈을 흘기며 테이블을 두드렸다.
“뭐하자는 거야?”
“고작 술 한 잔 가지고 뭘 그래? 그냥 마셔.”
“진짜 한 대 맞을래?”
“내가 사는 건데 예쁜 말 좀 하면 덧나?”
“안 내킨다고 했지. 그때도 그렇고 어떻게 하나부터 열까지 제멋대로야?”
“싫으면 마시지 마. 건배도 하지 말고.”
“이게 진짜…….”
사달멜리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을 때 수아로킨이 재빠르게 제조한 칵테일을 내 왔다. 투명한 얼음과 푸른 술이 담긴 잔에 레몬 조각이 꽂혀 있었다. 알타르프가 태연하게 제 잔을 끌어갔다. 가면을 살짝 들어 올린 틈새로 홀짝이려는 잔을 사달멜리크가 가볍게 가로챘다. 곧장 불만 묻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너 그냥 나 괴롭히고 싶은 거지?”
“우리가 하려는 일이 어떤 건데 이런 불길한 술을 덥석 마시겠다고? 리더로서 허락 못해.”
“언제부터 술 한 모금까지 단속했어? 그거 권력 남용이야.”
“하여간 안 돼. 이미 값을 치른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다른 걸 시켜.”
사달멜리크는 알타르프의 손이 닿지 않는 테이블 저편으로 잔을 치워 버렸다. 알타르프가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꾹 눌러 참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려는 일이 뭔지 잘 알아. 나도 다 생각하고 정한 일이야. 알잖아.”
“그러면 내 기분은 왜 초 치려고 해?”
그 말에 알타르프가 조용히 사달멜리크를 봤다.
“나를 못 믿는구나.”
누그러진 어조였다. 사달멜리크는 그 목소리에서 씁쓸함을 읽었다. 속에 숨은 섭섭함까지. 대답이 늦어져서는 안 됐다.
“그런 거 아냐.”
사달멜리크는 입술을 씹으며 내뱉었다. 제 머리를 헝클고 싶은 심정이었다.
“믿지 않으면 이런 일 못 맡겨.”
“그럼?”
팔찌를 끊지 않고 플라네타리움을 오가는 스파이 책무를 맡긴 이유는 오로지 알타르프의 고집이었다. 사달멜리크는 지금도 내심 알타르프가 그만두겠다고 말하길 바랐다. 원래도 실패할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알타르프가 얽힌 이상 실수조차 일어나서는 안 된다. 테이블 위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주저했다.
“믿는 거랑 별개인 일이잖아.”
“걱정돼?”
“…….”
사달멜리크가 잠자코 있자 알타르프는 몸을 일으켜 제 잔을 도로 가져왔다. 그는 술을 마시는 대신 잔 밑부분을 만지며 운을 뗐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술잔을 쥐고 있는 건 플라네타리움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야. 금기시되니까.”
“……알고 있어.”
“난 실패할 생각 없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거의 전부가 사실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었다면 충분히 걸어 볼 만해.”
“누군 아니라는 듯이 말하네. 만약의 상황이라는 게 있는 거잖아.”
“왜 갑자기 겁을 먹었어? 그런 것도 감수할 생각으로 벌인 일 아냐?”
“시끄러워. 네가 뭘 알아.”
“성질은.”
사달멜리크는 곧바로 대꾸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듣는 귀를 의식해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희생이 나지 않길 바랄 뿐이야. 나도, 날 믿고 모인 녀석들도 모두 각오한 일이지만 그런 일은 최대한 피하고 싶어.”
“각오했다면 그걸로 끝난 일이야.”
“너 내가 그렇게 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불길한 소리를 누가 하는 거야?”
“대답할 수 있으면 건배해 줄게.”
“…….”
이번에는 알타르프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모호했다. 불만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그저 생각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 뒤 변조된 음성이 다시금 흘러나왔다.
“한배를 탔으니까 누가 어떻게 돼도 똑같아.”
“두루뭉술한데. 그게 어떻게 똑같아?”
“불합격 줄 생각 하지 마. 대답은 했잖아.”
“말꼬리 잡는 데는 도가 터서…….”
사달멜리크가 못 이기겠다는 투로 결국 잔을 들었다.
“처신 잘 해. 잘못되면 가만 안 둬.”
“네, 네. 리더 님 말씀인데 아무렴.”
얼음이 살짝 녹은 블루 문 두 잔이 가볍게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한 모금 삼킨 알타르프가 작게 탄성을 냈다.
“주스 같다.”
“감상이 겨우 그거야?”
“생각보다 달고 상큼해. ……그리고 약간 쓴맛이 나는데, 술은 원래 이런가? 쓴맛이 더 약하면 좋겠어.”
“너는 그냥 하던 대로 지상에서 주스나 마셔.”
건배를 위해 유리잔이 몇 차례 더 오갔다. 취기가 올라 기분이 좋아진 듯한 알타르프가 말했다.
“우리 암호 같은 것도 하나 있어야지.”
“암호?”
“스파이니까.”
“뭐로 하고 싶은데?”
“난……이거.”
테이블에 기댄 알타르프의 손끝이 다 마신 유리잔을 툭 건드렸다. 그 술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고 사달멜리크는 생각했다.
“……마음대로 해.”
“너도 같이 쓰는 거야.”
“나도 알아.”
“좋아.”
알타르프가 미소 지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지금 저 표정을 실제로 보지 못하는 것이 몹시 아쉬웠다.
협력이 결정된 밤, 모든 일이 끝나면 사달멜리크가 알타르프의 팔찌를 끊어 주리라 약속했다. 그때가 되면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이 이윽고 찾아오기를 바라며 술잔을 들고 사달멜리크가 생각한 것은, 겨우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 주어야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