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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의 날

 

   「실패한다면 이곳으로 와.」

   마침표를 찍는 순간 제대로 조절되지 못한 손끝의 힘에 흑연이 부스러졌다. 채 정리되지 못할 잡동사니로 틈을 찾기 힘든 책상 위를 공연히 뒤져 보아도 여분은 없다. 그날, 불안하게 흔들리는 호박색 불빛 아래 널브러져 있었던 것은 이름을 부르고 가면을 벗는 대가로 바친 나의 전부였다. 탑을 거꾸로 처박기에는 너무나 허술했던 무장과 지면의 결의, 그리하여 실패하고 말리라는 메아리, 그럼에도 올라야 했던 계단의 설계도, 그리고 털어내면 흔적조차 남지 않을 흑연 가루.

   일말의 연민이라고 생각했다. 대가를 바치고도 가지지 못한 누군가의 삶에 대한. 그리고 고작 그런 것을 연료 삼아 연명하는 삶에 대한. 막 마침표를 찍은 문장 아래에는 어차피 몇 자 쓸 공간만이 남아 있었고 거기에 겨우 몸을 뉠 인사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나을 터다. 나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메시지로 완성된 라벨을 열쇠에 매단 후 잠시 그것을 응시했다.

   이것이 전달될 일은 없어야만 했다.

   몸을 일으켜 지상으로 향하는 문을 응시한다. 녹은 촛농을 비집고 위태롭게 타오르는 촛불을 불어 껐다. 도시의 지하에서 어둠이 기어오른다. 검은 망토가 끌리는 소리가 났다.

아네모네의 날

 

   도시가 지하의 삶을 부정하는 이유는 지상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명확해진다. 거기에는 결벽성이 있다. 태어나고 죽지 않는 이들의 태연함이 있다. 결코 위로 시선 돌리지 않는 청렴함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유리처럼 위태롭다. 고개를 들어 균열을 바라보고 만 이들은 다시 이방인의 지위를 버리지 못한다. 그리고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일에 뛰어든다.

 

   알타르프와의 마지막 대면은 예배당에서 지도자를 살해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 날이었다. 「들쑤시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김이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찻잔을 앞에 둔 채 손을 잡아끌어 그가 쓴 내용은 간지러울 정도로 가벼운 손끝에 비해 무거웠다. 「그래도 오래 가진 않을 거야. 꽤 무모해 보였거든.」 반대로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조금 더 크고 매끄러운 손바닥을 찌르듯 휘갈겼다.

   「그건 네 판단이지. 예배당에서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한 판단이었어.」

   「오히려 확실하게 눈을 피할 방법이었고. 너도 동의하잖아?」

   「…….」

   「흥미로운 것도 발견했고….」

   「나는 널 걱정하는 게 아니야. 계획을 걱정하는 거지.」

   「정말로?」

   내가 손을 멈추자 옆 건물에서 나오는 흐릿하고 태연한 노랫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두 겹의 가면을 사이에 두고도 표정을 읽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였다.

   「…얼마 남지 않았어. 쓸데없는 호기심은 자제해.」

   「그래도 날 믿는 거 알아.」

   「만약 오늘 일로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내가 가장 먼저 널 처리할 거야.」

   「그거 무서운데.」

   「…….」

   「걱정하는 눈빛이 뜨거워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알겠다니까.」

   난 너를 걱정하는 게 아니래도.

   손끝이 아리다. 부지불식간에 힘주어 쥐고 있던 손목을 맥없이 놓았다. 흑석 팔찌가 테이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시선도 표정도 목소리도 없었지만, 가면 뒤에서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러 고집 피우듯 손등에 덧붙여 썼다.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일이니까.」 알타르프가 손을 한 번 쥐었다 폈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내 손등을 어울리지 않게 다정한 손길로 매만졌다. 손가락이 살갗을 느리게 스치다 둥글게 도드라진 뼈를 쓰다듬는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글씨를 그려내듯이. 무어라 쓴 것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변조된 목소리 끝에 옅은 농조가 묻어 있다. 이내 손에 닿았던 온기가 떨어진다. 너와 나 사이에 음성으로 논할 수 있는 진실은 없다는 사실을 안다. 이만 가라는 듯 대강 휘저어지는 손끝. 그것이 만남의 끝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 위로 올라가고 있다. 그림자 같은 어둠 속에서 계단을 오르는 일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다. 책장의 뒤판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가면 뒤편을 상상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밖은 이른 오전이었다. 손목에 족쇄를 단 모든 봉사자는 예배당으로, 그렇지 않은 이들은 유리로 햇빛이 비쳐 드는 시간을 피해 발소리를 죽이고 있을 터였다. 찬장 아래 작업대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오로지 도시 구조로서의 삶을 위해 잘 관리된 꽃들의 향기가 가면 뒤로 스며들어 감각을 자극했다. 푸른 장미 아래, 쉽게 발각되지 않을 곳에 열쇠를 놓고 돌아서는데 평소보다도 아네모네 향이 짙었다. 정원 너머를 일별하자 저 멀리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처럼 솟은 흑색 탑이 어른거렸다. 충실히 정원을 돌보던 개가 사라져 잎이 시들고 가지는 앙상해지며 말라비틀어진 꽃잎이 바닥을 뒤덮을 때까지, 그리하여 다시 그 모든 것이 피어나지 못하고 붕괴하기 전까지, 그것이 내가 본 지상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네모필라의 날

 

   열쇠가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시선의 아득한 끝에서 울린 총성은 지하까지 닿지 않았다. 태연히 저문 하루가 곧 실패의 알리바이였고 난장판으로 변한 알타르프의 꽃집과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열쇠가 그것을 뒷받침했다. 기둥은 붕괴하지 않는다. 추락은 놀랍도록 고요했다. 한때 균열에 닿도록 올랐던 이상은 다시 수직으로 탑을 타고 내려와 온실을 휘돌고 마침내 지하보다 더 깊은 아래로 처박힌다. 전해지지 못할 거였다면 한 마디만 더 쓸 걸 그랬다. 계획의 실패와 동료들의 와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는 틈으로 불쑥불쑥 알지도 못하는 그의 낯이 비집고 들어왔다. 심지어 알타르프의 죽음을 그 모든 일보다 우선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감을 정당화했다. 이제 우리는 도시로 나갈 수 없다. 플라네타리움에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 견고한 성벽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므로 그를 대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터였다.

   하지만 그건 도시가 꽃집에 태연히 새로운 주인을 앉히는 것과 같은 행위였고, 망설임의 시간은 계속해서 길어졌다. 주인이라기보다 집을 지키는 개 같은 존재. 그럼에도 다른 누구라도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음이 낯설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사실이 이질적인. 책장 뒤판을 가면의 뒤처럼 바라본 적 없는 이들은 그곳에 다른 개가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가 그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한 이상 그의 어떤 부분은 영원히 대체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나와 그들의 다른 점이다.

   어떤 공백도 없는 것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도시의 일상에 적응할 때쯤, 또 한 번의 상실이 의지를 막아섰다. 하지만 그의 실패보다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이 끝으로 치닫는다 해도 믿음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알타르프를 알아?”

   그리고 내가 믿는 신은 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 아지트에서 마주친 봉사자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왔을 때 본능적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다.

   “……잘 아는 사이였던 모양이네?”

   이것이 네가 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도시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산이라고.

   “됐고, 뭐가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건데?”

   “……너희는 계속 그 가망 없는 반란을 할 생각이야?”

   짧은 웃음이 샌다. 기시감이 든다. 가망이 없어. 성공하지 못할 거야. 죽으면 다 소용없는데 이해가 안 가네. 네 죽음을 보았다는 이가 너와 똑같은 말투로 내 신경을 거침없이 긁고 있다. 사실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오기라도 한 줄 알았다. 혹은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는지도.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감히 네 이름을 꺼내며 뭐라도 되는 양 내게 설교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분노가 아니라면, 시그마는 확실히 다 꺼져 가는 촛불을 살릴 만한 도구였다. 그는 알타르프보다 운신이 자유롭고, 직급이 높고, 신뢰받으며….

   “무언가 알아낼 때까지 살아 있어. 무모한 짓 하지 말고.”

   마음이 약해 보였다.

   네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도시에 부역하고 계획을 망쳤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그랬다. 뒷모습에 대고 충동적으로 한 마디를 더 내뱉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라고 걔가 그런 식으로 죽길 바란 적 없어.”

   동요했을까.

   마치 그림처럼 멈추어 섰던 시그마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에 이어 책장 뒤판을 건드리는 소리가 난다.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다르지 않은 길을 걷는 모습에 반복되는 피로가 밀려왔다. 문득 부서진 연필과 나뒹구는 종이 조각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충동적으로 그것을 집어 들고 마지막 한 마디를 휘갈기고 나면, 나는 그것을 전할 방법이 이제 부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그마가 무언가 해내더라도, 나는 결코 그가 마지막으로 몸을 누였던 탑 위로 갈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너와 같이 올라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다 같이 이 땅에서 사라질 미래를 결단하면서도. 하지만 이제 너와 같은 얼굴을 한 수많은 이들 가운데서 너를 구분해 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실패하면 돌아오라는 말을 지키지 못한 것처럼, 나 또한 시그마가 무언가 알아낼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이다. 그날 내가 잃은 것은 단순한 동지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내게 깊은 물처럼 다가온다. 가만히 서 있다가는 거기에 잠겨 저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다.

마지막 날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났다. 혹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지하에서는 모두가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가늠한다. 사회와의 단절, 연결고리의 상실, 목적의 부재. 개인의 필요만이 흐르는 시간을 붙들 수 있다. 호흡하는 것만으로 생존을 충족하는 이에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논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당분간 현재를 살 필요가 없어진 나는 끈질기게 미래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 미래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과거를 한 글자씩 검토하곤 했다. 모서리가 닳은 일기장을 펴 놓고 어느 치열함이 모자랐는지 재어 보는 일. 어딘가 허술했는지, 방심했는지, 오만했는지, 간과했는지, 의심했는지, 맹목했는지…….

   팔찌를 끊기 전 사람을 찾아다니던 날이 아득하다. 실현 가능성에 대해 사납게 의견을 나누었던 새벽, 하마터면 터져 나올 뻔한 목소리에 입을 막고 침묵 속에서 눈을 마주치던 동지들, 이질적일 정도로 수월했던 준비와 비밀스레 신께 매달렸던 기도, 그리고 그날을 마지막으로 이어지지 않은 공백. 이 지면 위 도시에서는 아직 그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죽지 않았다.

   연필을 들고 망설인다. 건조한 문장들 아래 그 일을 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농담과 습관을 적어 둘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부재 또한 마찬가지여야만 했다. 「다시 기다리고 있다. 이전의 시작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몇 가지 단어와 마침표를 적절한 간격으로 나열하는 동안 아득한 머리 위 혹은 지하 밑에서 발끝을 타고 몸을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끌리듯 놓친 연필 끝이 이미 쓴 문장들 위로 선을 죽 그었다. 얼마 전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진동은 점점 빈도가 줄어들며 심해지고 있다. 마치 삭제된 듯 나뒹구는 문장을 바라보자, 무언가 미래를 쓰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계시처럼 스쳤다.

   나는 다시 연필을 잡고 부러진 흑연 끄트머리를 대충 갈아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너를 죽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그렇게 할 작정이었다.

   「아네모네의 날」

   「의식이 실패했다.」

   마치 다시 진동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메마른 침묵이 나 혼자뿐인 방을 채운다. 거기에 저항하듯 나는 그날의 마지막 문장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도 못한 연민 아닌 감정을, 잠겨 들지 않기 위한 최후의 저항처럼 느릿하게 기록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합당한 공백을 메우듯 찾아온 진동이 귀를 찢을 것처럼 들이닥쳤지만, 이번에는 연필을 놓치지 않았다.

   「알타르프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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